옛말을 새로이 닦아 승화한 웅숭깊은 시학
육근상 다섯 번째 시집, 『동백』
제12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시인, 육근상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절창』, 『만개』, 『우술 필담』, 『여우』 에 이어, "땅만 보고 살아온 사람들 삶의 절박함과 애환”과 그들의 다양한 토속적 입말, 자연과 구체적인 생활을 그려내는 육근상 시인의 특징이 다시 한번 잘 드러나는 시집이다.
"뚜껑이”, "개터래기”, "땅개”, "삐깽이” 등 시인이 나고자란 충청도의 토착어들이 즐비한 시구들은 시인만의 시정신을 낳는 지기地氣의 환유라 할 수 있다.
시인이란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삶과 전통, 그리고 방언에서 시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자연적이며 토착적인 존재이다. 그 점에서 육근상 시인은 "해체하고 분리되기를 전위로 삼고 있는 작금의 언어 환경”에 사람과 자연물 사이의 벽을 허무는, 우리 시대에 절실한 언어를 만들어내는 시인이다.
한 편의 토착어 사전을 연상케 하는 시집을 통해 충청도 언어가 지닌 해학과 자연과 인간의 서정성이 융합되는, 독자적인 시적 진실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母心의 모심’ 속에 깃든 지령地靈의 노래
"해나무팅이라는 곳은 다 헐 수 웂는 말 빈 마당 휘돌먼 천장 내려온 먹구렝이 문지방 넘어 대숲 아래 똬리 틀고 있다는 거다”
시인은 삶에서 발굴한 목소리들을 통해 시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 시집은 그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엄니)의 목소리를 조명하는데, "나름으로 깊은 수심정기의 세월 끝에 얻은 ‘엄니’라는 방언으로 유비되는 모심母心”을 투영한 시편들이 주목할 만하다.「해나무팅이」에서 "새벽밥 준비허던 엄니 / 투거리 들고 장 뜨러 나왔다 / 아덜아 오짠일여 언능 들어가자 / 아니다아니다 정짓간 들어가 / 주먹밥 쥐어주며 잽히먼 안 된다 / 엄니는 암시랑토 않응게 호따고니 넘어가그라 / 지푸재 새앙바위 뜬 그믐달인 거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엄니’의 생생한 목소리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어머니는 모종의 이유로 고향 집 ‘해나무팅이’를 몰래 들어선 아들과 갑작스럽게 마주치지만, 이내 "아니다아니다” 하며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또 아들이 엄니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해나무팅이를 떠나오는 광경에 화자는 "숨죽이고 핀 꽃들 펀던 달려나갔겠는가”라고 말한다. "숨죽이고 핀 꽃들”은 아들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라는 엄니의 "간절한 기운”을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시인의 시심 속의 지령이 조화의 기운과 접함을 통해 드러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한 삶을 버텨낸 토착민들의 수난과 그 속에 자리한 깊은 어머니의 마음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시의 이야기라면, 도저한 진실은 고향 집에 서린 모심母心은 시인의 마음속 지령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시가 그릴 수 있는 해학의 지점
서정과 능청스러운 입담의 절묘함
"해나무팅이 삼얕 집 아줌니 어디 가시나 궂은 날 탱자나무 걸린 비닐봉지 걷어 쓰고 소쿠리는 끼고 개울물 토닥토닥 어딜 그렇게 고요히 가시나”
토속적인 것에 대한 그립고 정겨운 심상이란 현대인에게 희미해져 가는 가치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시가 다할 수 있는 의무를 지니고 가치를 지켜내는 시인은 그만의 고유한 언어로 어떤 경계도 없이 표준어주의 속에 번지고 스며들어 우리에게 잊고 있던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시인은 삶의 자리를 관찰하고 표현해내는 특유의 시선과 입말로 시가 그릴 수 있는 해학의 고유 지점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다. 충청 지방 토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어도 자연스레 읽히는 시어들은 정겨움과 각기 자리한 ‘모어’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는 동시에 기분 좋은 웃음을 만들어준다.
"벙거지 쓴 아이들 몰려와
지그린 문 두드린다
이것은 빠꾸 손자
조것은 개터래기 손녀
요것이 여울네 두지런가
베름빡 달라붙어 봄바람 타고
손 내밀어 문고리 잡아당기고
성황당 자리 맴돌다 솟아오른다
요놈들
요놈들
마당 한 바퀴 돌아
흩날린다”
시인은 "땅개”, "개터래기”, "삐깽이”, "똥지개이” 등을 소환해 "‘판’ 벌였다”고 말하는데, 「봄눈」에서 이 같은 ‘동무’들의 손자, 손녀 등이 등장한다. 자손을 이루고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서로를 ‘빠꾸’, ‘개터래기’ 등으로 부르는 화자와 동무들의 모습에서 다정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저자(글) 육근상
1960년 대전광역시에서 태어나 1990년 『삶의문학』에 참여하면서 시를 발표했다. 시집으로『절창』,『만개』,『우술 필담』,『여우』등이 있으며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제비꽃 제비꽃 … 13
봄눈 … 14
동춘당 … 15
해나무팅이 … 16
화엄장작 … 18
이사 … 20
봄볕이 찾아와 … 21
소만 … 22
꿀벌 … 24
오지 않는 시 … 26
동백 … 28
사랑 … 30
제2부
옛집에 와서 … 33
씨앗달 피었던 자리 … 34
쾌청 … 35
천근 벙어리 샘 … 36
남겨둔 말 … 37
금강에서 … 38
곶감 … 39
흐린 날 … 41
서른 살 … 42
유두절 … 45
백중 … 47
불길한 저녁 … 48
마당 읽는 밤 … 49
백제 미소 … 51
한식에 … 52
제3부
벽화 … 57
가을 … 58
적막 … 59
파수꾼 … 61
청춘 잡아라 내 청춘 도망간다 … 62
상강 … 64
유성동백 … 65
벌판 … 67
빈 그늘 … 68
엄니 냄새 … 70
뭔 말잉고 허니 … 71
지는 노을 … 74
밥도둑 … 75
덧정 … 78
제4부
지금은 깊은 밤이네 … 81
늙은 집이 말을 건다 … 82
찬 별 … 84
나비란 … 86
난전에서 … 88
가래울자리 … 90
동지 무렵 … 91
환한 세상 … 93
날파리 증 … 94
겨울의 끝 … 96
해탈 … 97
跋 | ‘母心의 모심’ 속에 깃든 地靈의 노래_임우기
책속으로
지극한 마음의 경지, 곧 수심정기의 시 정신은 하느님과 수운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는 경지이므로 시인의 마음은 비로소 하느님[侍天主] 즉 천지와 ‘틈이 없는 묘처요 영처’로서 불이 상태이다. 수운과 지극한 제자 해월海月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듯이, 엄니의 모심과 시인의 마음이 불이인 경지로 통한다. 이 시에서 엄니의 마음에서 ‘아부지’는 없는 있음이요 있는 없음이며 바깥(‘베까티’)은 엄니의 지극정성의 마음 안이다. 엄니의 마음은 밖이 안이고 안이 밖인 불이인 경지이며 이러한 모심은 고스란히 시인의 시심이 된다. 모심과 시심에 귀신이 불이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불이의 귀신이 어둡고 추운 겨울 한밤에 핀 ‘동백’으로 표상된다. 시인 육근상의 지극한 수심정기가 표상된 ‘동백’은 귀신의 작용에 따라 ‘컹컹’ 짖을 수 있는 초감각적 존재이다.
-발문「‘母心의 모심’ 속에 깃든 地靈의 노래」중에서ㆍ임우기 문학평론가
봄눈
벙거지 쓴 아이들 몰려와
지그린 문 두드린다
이것은 빠꾸 손자
조것은 개터래기 손녀
요것이 여울네 두지런가
베름빡 달라붙어 봄바람 타고
손 내밀어 문고리 잡아당기고
성황당 자리 맴돌다 솟아오른다
요놈들
요놈들
마당 한 바퀴 돌아
흩날린다
뜨락에 흰 꽃 피었으니
바람 따라간 것도 있으리
돌아가 영영 오지 않는 것도 있으리
꿀벌
엄니가 생을 다하여
사경 헤매고 있던 날
마당 가득하게 작약은 피었네
뜰팡에 벌통 몇 개 놓고
꿀 따곤 하셨는데
겨울날이면 늬덜두 목숨인디 먹구살으야지
아나 아나
벌통에 설탕물 부어주곤 하셨네
그러던 초파일이었을 것이네
보광사 연등이 마을 휘돌아
나처럼 흔들리던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네
꿀벌은 엄니 보이지 않자
모두 날아가 버렸네
허리에 상복 무늬하고
끝없이 걸어 나오던 꿀벌들
밀랍을 먹감나무 가지에 발라놓아도
영영 돌아오지 않았네
벽화
저 산은 콩새 한 마리 그려 넣는 데 온 힘 다하였다
저 바위는 가슴 그어 바람길 만드는 일로 꼬박 새웠다
얼었던 강물이 쩡하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흘러갔다
새 소리도 바람 소리도 강물 소리도
나를 흔들어 깨우느라 일생 다 지나갔느니
가래울자리
1
호두나무 집 부부가 흘러가는 강변길이다
허리를 반쯤 내민 청무는 늦둥이인가 보다
양쪽 귀퉁이가 다 헤진 골짜기 들어서면
지붕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반짝거린다
저녁상 물린 집들이 일찍 펼쳐놓은 별자리 같다
2
밤 길은 여적 나를 따라왔었나 보다
인기척 없는 마당 먼저 들어가
말린 고사리 한 줌 불리고 설거지허고
숟가락 젓가락 달그락거려 늦은 저녁 먹고
웅크리고 앉아 가래울자리 만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