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성실하고 세밀한 비평으로 시집마다 새 자리를 열어온
평론가 조재룡의 글쓰기-노동-예술
놀라운 열정과 부지런한 독서로 한국 현대시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비평해온, 말 그대로의 현장비평가, 조재룡의 다섯번째 평론집 『시집』(문학과지성사, 2022)가 출간되었다. 불문학자로서 엄격한 번역가로도 잘 알려진 그는, 2003년 『비평』을 통해 데뷔한 이래 20여 년간 활발한 비평 활동을 이어왔으며 2018년에는 "한국 시를 지독할 정도로 세밀하게 관찰하는 비평, 시대의 맥락에서 시를 읽고 시학을 뜨겁게 실증하는 비평”이라는 평을 받으며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총 23편의 비평문을 3부에 나누어 실은 이번 비평집은 몇 편의 시론을 제외하고 2018~21년까지 약 3년간 쓴 해설을 한데 묶었다. 이론 틀에 기계적으로 맞추어 해설하는 방식을 경계하며 문학 텍스트를 여러 차례 충실하게 읽고 수많은 메모를 붙여가며 매번 최선을 다한 결과물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 복문과 쉼표로 길게 이어지는 조재룡의 문장들은 언뜻 어렵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로써 견인되는 입체적 의미들을 통해 그만의 고유한 글쓰기-노동이자 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흔히 시집의 뒤에 붙는 해설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처음 독서를 고백하는 글이고, 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시집과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글이다. 시집은 하나의 ‘작품œuvre’이다. 프랑스어를 함께 적은 이유는 이 낱말이 ‘작업’ ‘일’ ‘노동’의 의미를 포함한 ‘기예(技藝)’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어원을 이루는 ‘tripalium’이 ‘세 개의 봉으로 찌르는 고문 도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면, ‘작품’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이라기보다, 강제적인 무엇, 혹은 어떤 ‘기계성’을 필요로 하는 기예의 과정이자 그 결과물이다. 시집은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 ‘작품’이다. -「책머리에」
다양한 세대의 시인을, 각각의 어법에 맞게 해석해내는 의지
젊은 시인들의 편을 들어주고 그들의 시를 읽어주려고 애씁니다. 시인과 비평가의 나이 차이가 벌어지면 서로 어긋납니다. 나이 든 비평가 스스로의 몸이 못 따라가는 건데 오히려 화를 내기도 하죠. ‘요즘 시인들 이해를 못 하겠어. 요즘 시는 너무 분열해. 아름다움과 서정을 포기했어’라면서요. 비평가가 시인의 어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비평을 하나요. 서태지를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혁오를 알겠어요. 비평을 하려면 이미자를 듣던 사람도 서태지를 들어야 해요. 춤도 춰 보고요. 시는 변신합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게 비평인데, 거꾸로 비평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예요. ―『한국일보』 인터뷰
평론가 조재룡의 특장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세대의 시인을 그 시인의 어법에 맞춰 해설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비평집의 구성에서도 세대별 안배를 엿볼 수 있다. 1부에서는 이원, 이수명부터 정한아, 이영주, 이제니 등 1990~2000년대 시인이라 묶일 수 있는 시인들의 시집 리뷰를 실었다. 저자와 가장 밀접한 세대로 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엿보인다. 2부에서는 그 이전 세대라 부를 만한 황인숙의 시인론부터, 나희덕, 최정례, 남진우 등의 근간 시집 해설이 담겼다. 상당한 구력의 시인들에 관한 글인 만큼 해당 시집뿐 아니라 그간의 시적 궤적을 입체적으로 읽어냄은 물론이다. 3부 첫머리는 「신과 함께―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로 열린다. 조정인, 조연호의 시로 시작해 정한아와 문보영, 안미린, 유희경의 시로 이어져 이들의 시 안에서 드러나는 신(神), 절대적이고 전체적인 신보다는 세계에 내재한 신, 시인으로부터 다양한 존재로서 호명되며 형식적으로든 의미적으로든 여러 방식으로 재현/실험된 신의 존재를 다각적으로 읽어낸다. 이어 김유림, 이지아, 박은정, 류진, 강보원까지 ‘젊은 시인’으로 주목받는 이들의 첫번째 시집에 관한 해설을 담아냈다. 각 부에 수록된 평문들을 한자리에 놓고 읽다 보면 조재룡 특유의 문체 안에서도 다른 톤과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시단 안에서 각자의 스타일로, 따로, 또 같이 빛나고 있는 시집들. 이들마다의 언어 개성을 파악하고 저마다의 위치를 확인하여 정밀한 별자리를 그려내는 조재룡의 새 비평집, 바로 『시집』이다.
■ 목차
책머리에
제1부
2000년대의, 시, 그리고 비평-주체-정치-정동-리듬
부정성의 시학-정한아의 『울프 노트』
‘끝없는 끝in fine sine fine’ 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체-대상-행위의 무효와 노동의 종말에 관하여-이수명의 『물류창고』
목소리의 탄생-이제니의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기록할 수 없는: 공포와 부정의 이야기-이영주의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실패하는 로망, 폭력과 주이상스의 기억술-정다운의 『파헤치기 쉬운 삶』
부재하는 발화, 재현 불가능한 기록-이원의 『사랑은 탄생하라』
"나의 시인이여, 이제 그만 죽어도 된단다”: 피 흘리는 꿈, 납작한 마음-김경인의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제2부
길 위의 시학-황인숙의 시 세계
죽음-주검-죽임, 폐허에서 부르는 노래-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
펄프의 꿈, 도착(倒錯)의 전화(前化):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남진우의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에피소드의 발명, 알레고리의 시학-최정례의 시 세계
죽음, 시간성, 꽃피는 고백-최문자의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섭리의 뼈와 살, 소립자의 거처-조정인의 『사과 얼마예요』
특이점의 몽타주, 들끓는 타자-정채원의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제3부
신과 함께-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미로의 미래: 생각, 그리고 편지의 탄생-김유림의 『양방향』
이것은 (트랜스로직translogic), 현대성, 판단 중지(의-와의) 전쟁: 리버스와 어댑터, 스타카토의 불꽃-이지아의 『오트 쿠튀르』
유리병에 담긴 사랑의 파이-박은정의 『밤과 꿈의 뉘앙스』
대위(對位)하는 언어, 다면체의 시소(詩所)-류진의 『앙앙앙앙』
검은 노트의 문장을 들고 거리를 걸으며 참외와 거위의 ‘as if -미래’를 생각하는-생각하지 못하는, 가능성-불가능성의 이원론을 밟고 걸어 다니는 코끼리의 식사법과 연립주택 102호 정리하기-잠자기, 의미-의문의 자리와 글쓰기의 방식을 타진하기-강보원의 『완벽한 개업 축하 시』
■ 저자소개
저자 : 조재룡
파리 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와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고려대학교 번역과레토릭연구소의 전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고려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 『비평』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 중이며, 시학과 번역학, 프랑스와 한국 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평론을 집필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앙리 메쇼닉과 현대비평: 시학, 번역, 주체』 『번역의 유령들』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번역하는 문장들』 『한 줌의 시』 『의미의 자리』 『번역과 책의 처소들』 『아케이드 프로젝트 2014-2020 비평 일기』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앙리 메쇼닉의 『시학을 위하여 1』, 제라르 데송의 『시학 입문』, 루시 부라사의 『앙리 메쇼닉 리듬의 시학을 위하여』,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유한과 무한』,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 장 주네의 『사형을 언도받은 자/외줄타기 곡예사』, 샤를 페펭과 쥘의 『철학백과사전 2』, 로베르 데스노스의 『알 수 없는 여인에게』, 레몽 크노의 『떡갈나무와 개』 『문체 연습』, 자크 데리다의 『조건 없는 대학』, 미쉘 포쉐의 『행복의 역사』 등이 있다. 2015년 시와사상 문학상, 2018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하였다.